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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가 남는 곳 · 파도가 있는 자리 · 4회

소설집 · 파도가 있는 자리

파도가 있는 자리 · 4회

온기가 남는 곳 · 서용준

"어떤 얘기야?"

민지는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도시에서 지친 여자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다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얘기."

지훈은 그 말에 살짝 웃었다."그거, 너 얘기 아니야?"

"어, 조금은." 민지도 따라 웃었다."근데 쓰다 보니까, 그 여자가 나랑은 좀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하더라. 처음엔 몰랐는데, 쓰면서 그 사람이 점점 자기만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 같아."

"신기하다." 지훈이 말했다."나도 노트에 뭐 쓰다 보면, 가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제야 알게 되더라."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등대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할 즈음, 해가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등대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둘은 등 대 아 래 계단 에 나 란 히 앉아 그 풍경을 바라봤다.

"진짜 예쁘다." 민지가 나직이 말했다.

"그치." 지훈은 그 풍경을 보다가, 문득 민지를 돌아봤다. "너 여기 오길 잘한 것 같아?"

민지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모르겠어. 근데 적어도, 후회는 안 해."

"나도 그래."

둘은 한동안 말없이 노을을 바라봤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왔다. 민지는 문득 지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훈도 그 순간 민지를 보고 있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침묵 속에서, 뭔가가 분명해지고 있었다. 굳이 말로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어떤 마음.

지훈이 먼저 손을 뻗어, 민지의 손을 살짝 잡았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민지는 그 손을 피하지 않았다.

"우리, 이거 뭔지 모르겠지만," 지훈이 조용히 말했다." 천천히 알아가도 될까."

민지는 그 말에 웃었다."어, 천천히."

노을이 완전히 붉게 물들 때까지, 둘은 그렇게 손을 맞잡고 앉아 있었다. 대단한 고백도, 극적인 순간도 아니었다. 그냥 두 사람이, 각자의 속도로 걸어온 길이 여기서 자연스럽게 만난 것뿐이었다.

돌아오는 길, 어두워진 오솔길을 걸으며 민지는 생각했다. 이 관계가 어디로 향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적어도 지금은, 그 불확실함이 예전처럼 무섭지 않았다.

메일이 온 건 예상치 못한 순간이었다.

민지는 여느 때처럼 저녁에 노트북을 열었다. 소설을 쓰기 전, 습관처럼 메일함을 확인했다. 낯선 발신자 이름이 눈에 띄었다. 한 출판사의 편집자였다.

몇 년 전, 작은 공모전에 냈던 단편이 있었다. 그때는 최종 심사에서 떨어졌지만, 심사평 중 하나가 유독 좋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 편집자가, 그때 그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혹시 지금도 글을 쓰고 계신가요? 그때 그 단편이 오래 기억에 남아서, 다른 작업이 있는지 여쭤보고 싶어 연락드립니다."

민지는 그 메일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의 글에 관심을 가져준 순간이었다.

답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이 있다고, 아직 완성은 아니지만 조금 더 진행되면 보여드리고 싶다고 썼다. 보내고 나서도, 민지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며칠 뒤, 편집자에게서 다시 답장이 왔다. 원고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서울에서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정식 계약을 약속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구체적인 관심 표명이었다.

민지는 그 메일을 읽고 나서, 이상하게 마음이 복잡해졌다. 기쁘면서도, 동시에 불안했다. 서울로 다시 가야 한다는 것. 이 마을에서의 삶을, 그리고 지훈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날 저녁, 민지는 국숫집으로 향했다. 마감 시간이 다 되어 손님은 없었다. 지훈은 민지의 표정을 보고 뭔가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어?"

민지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 메일 이야기를 꺼냈다. 지훈은 처음엔 놀란 얼굴이었다가, 곧 환하게 웃었다.

"진짜 잘됐다! 축하해."

"아직 계약된 것도 아니고, 그냥 만나서 얘기해보자는 거야."

"그래도 대단한 거잖아." 지훈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았다."네가 그렇게 오래 써온 게, 드디어 뭔가로 이어지는 거네."

민지는 그 반응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런데 동시에,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근데," 민지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이걸 준비하려면, 서울에 자주 왔다 갔다 해야 할 것 같아. 어쩌면 다시 올라가야 할 수도 있고."

지훈의 표정이 순간 미묘하게 변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민지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렇겠지." 지훈은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원하는 거잖아. 그럼 해야지."

"근데 나는…" 민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이 마을을, 그리고 지훈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오랫동안 원했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동시에 있었다.

"천천히 생각해봐." 지훈이 말했다."당장 결정할 문제는 아니잖아."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지훈의 목소리에도, 뭔가 불안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민지는 그걸 느끼면서도, 딱히 뭐라 해줄 말을 찾지 못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민지는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원하던 기회가 찾아왔는데,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처음 이 마을에 돌아왔을 때는, 서울에서의 삶을 완전히 실패로 여겼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마을에서의 삶도 놓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민지는 어둠 속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두 가지를 다 가질 수는 없는 걸까. 아니면 결국, 뭔가는 포기해야 하는 걸까.

그날 이후로, 민지는 소설에 더 매달렸다.

편집자와의 약속을 위해 원고를 최대한 다듬어야 했다.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글을 썼다. 예전처럼 막막해서 못 쓰는 게 아니라, 이번엔 시간에 쫓겨서 못 쓰는 상황이 됐다. 밤늦게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날이 늘었다.

자연스럽게, 지훈과 만나는 시간이 줄었다. 저녁마다 만나던 방파제 산책도 뜸해졌다. 민지는 그때마다 죄책감이 들었지만, 지금은 원고에 집중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지훈은 처음엔 이해한다는 듯 굴었다.

"바쁘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서, 지훈의 문자도 조금씩 뜸해졌다. 예전 같으면 매일 오던"오늘 시간 돼?" 같은 연락이, 이제는 며칠에 한 번꼴로 왔다. 민지는 그걸 눈치챘지만, 원고 마감이 급하다는 이유로 그냥 넘어갔다.

어느 날 저녁, 오랜만에 국숫집에 들렀다. 지훈은 반갑게 맞아주면서도, 어딘가 예전과는 다른 온도였다.

"요즘 잘 안 보이네."

"미안, 원고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괜찮아, 중요한 일이잖아."

말은 그렇게 하는데, 표정은 완전히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민지는 그걸 느끼면서도, 뭐라 먼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서울 가는 건, 언제쯤이야?"

"아직 정확히는 몰라. 원고 완성되는 대로 연락드리기로 했어."

"그렇구나." 지훈은 그릇을 정리하며 시선을 피했다." 완성되면… 계속 거기 있는 거야?"

민지는 그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사실 자기도 정확히 몰랐다. 계약이 성사되면 어떻게 될지, 서울에 다시 자리를 잡아야 할지, 아니면 여기서 오가며 작업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어."

"그래." 지훈의 대답이 짧았다.

그날 대화는 그렇게 어 색하게 끝났다. 민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음이 무거웠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딱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며칠 뒤, 지훈에게서 연락 이 뚝 끊겼다. 민지도 먼저 연락하지 못했다. 원고 마감도 있었고, 동시에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였다. 이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는 게 두려우면서도, 그걸 깨는 게 더 두려웠다.

동네 슈퍼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둘은 짧은 인사만 나누고 지나쳤다. 예전 같으면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을 텐데, 이제는 그 짧은 인사조차 어색했다.

민지는 밤마다 원고를 붙잡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점점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는데, 정작 현실의 자신은 뭔가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밤, 민지는 쓰던 원고를 멈추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 소설을 완성하는 게,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과 같은 방향인지 문득 의심이 들었다. 아니면 그냥, 예전에 놓쳤던 걸 다시 붙잡으려는 조급함에 다른 소중한 걸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며칠을 그렇게 뒤척이던 어느 밤, 민지는 쓰고 있던 소설을 다시 읽어봤다.

주인공은 도시에서 지친 채로 고향에 돌아온 여자였다. 처음 몇 챕터는 잘 풀렸다. 그런데 최근 며칠간 쓴 부분들은, 뭔가 이상하게 겉돌고 있었다. 문장은 매끄러웠는데, 어딘가 공허했다.

민지는 그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최근 쓴 부분들은, 주인공이 혼자 성장하는 이야기로만 흘러가고 있었다. 처음 이 소설을 구상했을 때는, 주인공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조금씩 변해가는 이야기였는데, 어느새 그 관계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민지는 문득 자기 자신을 돌아봤다. 원고에 매달리면서, 정작 이 마을에서 자신을 다시 살게 해준 것들 — 이장님의 사소한 부탁, 어머니의 무심한 말들, 그리고 지훈과 나눈 대화들 — 을 하나씩 밀어내고 있었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완성한 원고가, 정말 자기가 원하던 소설이었을까. 민지는 그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민지는 노트북을 덮고 밖으로 나갔다. 국숫집으로 향하는 길, 마음이 복잡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정하지 못한 채였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지훈이 놀란 얼굴로 쳐다봤다.

"어, 웬일이야. 원고는?"

"잠깐 쉬려고." 민지는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너랑 얘기하고 싶어서."

지훈은 잠깐 말없이 민지를 바라보다가, 맞은편에 앉았다.

"요즘 좀 서운했지." 민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연락도 잘 안 하고, 만나지도 못하고."

지훈은 대답 대신 어 깨를 으쓱했다."괜찮아. 중요한 일이었잖아."

"근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나 싶어." 민지가 조용히 말했다."요즘 다시 생각해봤는데, 나 이 원고 쓰면서, 오히려 처음 이 마을에 돌아왔을 때 느꼈던 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같아."

지훈은 그 말에 잠깐 표정이 흔들렸다.

"이장님 부탁으로 소식지 쓰던 것도, 너랑 나눈 얘기들도, 다 이 소설을 다시 쓸 수 있게 해준 것들인데. 근데 정작 마감에 쫓기면서, 그 모든 걸 밀어내고 있었어."

" 그 래 서," 지 훈 이 조 심 스 럽 게 물 었 다." 이 제 어 떻 게 하려고?"

"모르겠어, 원고를 그만두겠다는 건 아니야." 민지는 잠깐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근데 예전처럼, 이거 하나에 모든 걸 걸지는 않으려고. 서울 가는 것도, 계약도, 다 중요하긴 한데, 그것 때문에 지금 여기 있는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지훈은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한참 후, 그가 물었다.

"나도 그중 하나야?"

민지는 그 질문에 살짝 웃었다.

"어, 아마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

지훈의 얼굴에 그제야 옅은 미소가 번졌다.

"미안했어." 민지가 덧붙였다."혼자 조급해져서, 너한테 제대로 얘기도 안 하고."

"나도 미안해. 서운하다고 말도 못 하고 그냥 거리 뒀어." 지훈이 대답했다."너 바쁜 거 알면서도, 괜히 서운했거든."

둘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며칠간의 어색함이, 그 순간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럼, 오늘 저녁에 산책 갈까?" 지훈이 물었다.

"어, 좋아."

그날 저녁, 둘은 오랜만에 방파제를 함께 걸었다. 예전처럼 자연스러운 대화들이 오갔다. 민지는 그 익숙한 풍경과 익숙한 사람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