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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가 남는 곳 · 파도가 있는 자리 · 3회

소설집 · 파도가 있는 자리

파도가 있는 자리 · 3회

온기가 남는 곳 · 서용준

쓰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 유치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끝에서 뭔가가 움직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문장 하나를 완성했을 때 느껴지는, 작은 성취감 같은 것.

민지는 그 밤, 몇 시간을 계속 썼다. 축제 안내, 마을 소개, 그리고 몇몇 상점들에 대한 짧은 소개글까지. 국숫집

이야기를 쓸 때는 자연스럽게 지훈이 떠올랐다. 삼십 년 넘게 이어온 손맛, 어머니에게서 아들로 이어지는 이야기. 민지는 그걸 짧은 몇 문장으로 담아냈다.

다음 날, 민지는 그 원고를 이장님께 건넸다. 이장님은 한참을 읽더니, 얼굴이 환해졌다.

"이야, 이거 완전 다르네. 훨씬 잘 읽혀."

"다행이에요."

"고맙다, 진짜. 다음에도 이런 거 있으면 부탁해도 될까?"

민지는 그 말에 잠깐 망설이다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민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대단한 글을 쓴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마을 소 식지에 들어 갈 몇 문장이었다. 그런데 그 몇 문장을 쓰는 동안, 오랜만에 뭔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잘 써야 한다는 압박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너무 오래 손을 놓고 있어서 아주 작은 것에도 반응한 걸까.

민지는 그날 밤,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이번엔 소식지가 아니었다. 재작년 겨울에 쓰다 만 그 소설이었다. 세 줄뿐이던 문서를 다시 열어, 커서를 끝에 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여전히 다음 문장이 쉽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예전과는 조금 달랐다. 완전히 막막하지만은 않았다. 뭔가, 아주 조금은 실마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민지는 천천히, 네 번째 줄을 쓰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로, 민지의 하루엔 조금씩 리듬이 생겼다.

아침엔 어머니와 함께 간단히 밥을 먹고, 낮 동안은 마을 소식지 일을 도왔다. 이장님은 생각보다 자주 부탁을 해왔다. 어촌계 소식, 노인정 행사 안내, 심지어 마을 홈페이지에 올릴 짧은 글까지. 민지는 그 부탁들을 하나씩 받아 처리했다. 대단한 글은 아니었지만, 매번 뭔가를 완성했다는 감각이 쌓여갔다.

저녁이 되면, 민지는 그 소설을 다시 붙잡았다. 재작년 겨울에 멈춰버린 이야기였다. 도시에서 방황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 처음 구상했을 땐 자기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어쩐지 지금의 자신과 겹쳐 보였다.

진도는 느렸다. 하루에 몇 줄, 어떤 날은 한 문장도 못 쓰고 노트북을 덮기도 했다. 그런데 예전과 다른 점이 있었다. 못 쓴 날에도, 예전만큼 좌절하지 않았다. 그냥 내일 다시 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지는 그 변화가 어디서 왔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마 소식지 일 덕분인 것 같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그 사소한 글들을 쓰면서 다시 배운 셈이었다.

어느 날 저녁, 민지는 바닷가를 걷다가 우연히 지훈을 만났다. 가게 마감을 하고 나온 참이었다.

"요즘 뭐 하고 지내?" 지훈이 물었다.

"이장님 부탁으로 소식지 같은 거 쓰고 있어. 그리고…" 민지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예전에 쓰다 만 소설도 다시 붙잡아봤어."

지훈의 얼굴이 환해졌다."진짜? 잘됐다."

"아직 얼마 못 썼어. 그냥 시작만 한 정도야."

"그래도 시작한 게 어디야." 지훈이 말했다."나도 요즘 노트에 뭐 좀 끄적이고 있어. 별거 아니지만."

"무슨 얘기?"

"그냥, 여기서 지내면서 드는 생각들. 어머니 얘기도 좀 쓰고." 지훈은 살짝 부끄러운 듯 웃었다."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쓰다 보면 마음이 정리되더라고."

둘은 나란히 방파제를 걸었다. 파도 소리가 계속 배경처럼 깔렸다.

" 신기하다." 민지가 말했다." 우리 둘 다, 뭔가 다시 시작하고 있네."

"그러게." 지훈이 대답했다."근데 이게 맞는 방향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나도 그래. 근데," 민지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예전엔 맞는 방향인지 아닌지가 제일 중요했거든. 근데 요즘은 그냥, 오늘 뭔가를 썼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 같아."

지훈은 그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는 말이네."

둘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바다가 붉게 물들어갔다. 민지는 그 풍경을 보며, 오랜만에 뭔가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서울에서는 이런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냥 걷고, 파도 소리를 듣고,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

집으로 돌아온 민지는, 그날 밤도 소설을 붙잡았다. 여전히 느렸다. 그런데 오늘은 한 문단을 다 썼다. 작은 진전이었지만, 민지에게는 크게 느껴졌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가게에 손님이 뜸했다. 지훈은 셔터를 반쯤 내리고, 그냥 창밖을 보고 있었다. 빗소리가 가게 안을 채웠다. 그때 문이 열리고, 민지가 우산을 접으며 들어왔다.

"비 온다고 왔어?"

"딱히 갈 데가 없어서." 민지는 젖은 어깨를 털며 자리에 앉았다.

지훈은 국수 대신 따뜻한 차를 한 잔 내왔다. 둘은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아 비 내리는 풍경을 봤다. 골목이 젖어 반짝였다.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종종걸음으로 지나갔다.

"이런 날은 이상하게 옛날 생각이 나." 민지가 문득 말했다.

"무슨 생각?"

"고 3때, 이 근처에서 비 맞고 걸었던 거." 민지는 창밖을 보며 웃었다."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 안 나는데, 비 맞으면서 걸었던 그 느낌만 기억나."

지훈도 그 말에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 표정이었다.

"나도 그런 거 있어. 중학교 때, 여기서 국수 먹다가 엄마한테 혼났던 거. 뭐 때문인지는 기억 안 나는데, 그때 엄마 표정만 생각나."

둘은 잠깐 웃었다. 어릴 적 기억이라는 게, 이유는 흐려져도 감각만 남는다는 게 신기했다.

"근데," 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너 요즘 소설 쓰는 거, 잘 되고 있어?"

"조금씩." 민지가 대답했다."아직 갈 길이 멀어. 근데 예전처럼 무섭지는 않아."

"뭐가 무서웠는데?"

민지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까 봐. 글도 못 쓰고, 그렇다고 다른 것도 못 하고. 그렇게 계속 아무것도 아닌 채로 나이만 먹을까 봐."

지훈은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뭐라 위로하려 하지 않았다. 그냥 듣고 있었다.

"나도 비슷한 거 있어." 지훈이 말했다."여기서 국수 끓이면서, 이게 정말 내 삶인지, 아니면 그냥 도망쳐 온 건지 헷갈릴 때가 있어."

"근데 지금은?"

"지금은," 지훈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도망친 거든 뭐든,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게 나쁘지 않다고 느껴. 완벽한 답은 아니지만."

민지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다, 정답을 찾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불확실함을 서로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위안이 됐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지훈이 문득 물었다.

"너, 여기 얼마나 더 있을 거야?"

민지는 그 질문에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모르겠어. 정해놓은 건 없어."

"그렇구나." 지훈은 짧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 말투에 뭔가 아쉬운 기색이 묻어 있었다.

민지는 그걸 눈치채고, 순간 마음이 이상하게 흔들렸다. 지훈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그리고 자기 마음도, 예전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근데," 민지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당분간은 여기 있을 것 같아. 아직 여기서 할 일이 남은 것 같아서."

지훈은 그 말에 살짝 웃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웃음이,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비는 저녁 늦게까지 계속됐다. 둘은 가게 안에서 오래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대단한 고백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그날, 둘 사이에 뭔가 확실히 달라진 게 있었다.

어머니의 퇴원 날짜가 잡힌 건 그로부터 한 달쯤 뒤였다.

지훈은 그 소식을 듣고, 이상하게 마음이 복잡했다. 기쁘면서도, 동시에 뭔가 걱정이 됐다. 어머니가 돌아오면, 다시 가게 일을 나눠서 해야 할까. 아니면 지훈이 계속 맡아서 해야 할까.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하루의 리듬이, 다시 흔들릴 것 같았다.

퇴원하는 날, 지훈은 아침 일찍 가게 문을 닫고 병원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며, 지난 몇 달을 돌아봤다. 처음 내려왔을 때는 막막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이 삶이 조금씩 익숙해져 있었다.

병실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이미 짐을 다 정리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왔니."

"네, 짐은 이게 다예요?"

"어, 별거 없어."

지훈은 짐 가방을 들고, 어머니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 오랜만에 보는 바깥 공기에, 어머니는 잠깐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좋다."

버스를 타고 마을로 돌아오는 내내, 어머니는 창밖을 계속 바라봤다. 익숙한 풍경들이 지나갈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마을에 도착해 국숫집 앞에 이르자, 어머니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가게를 올려다봤다. 셔터, 유리문, 그 안의 테이블들. 다 그대로였다.

"그대로네."

"바꿀 이유가 없었어요."

어머니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둘러봤다. 메뉴판을 손으로 쓸어보고, 주방 쪽을 들여다봤다. 지훈은 그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국물 좀 줘봐."

지훈은 육수를 한 그릇 떠서 건넸다. 어머니는 그걸 한 숟갈 먹어보고, 한참 말이 없었다.

"어때요?"

"음." 어머니는 다시 한 숟갈 떠먹었다."이거, 네 맛이네."

"이상해요?"

"아니."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좋아. 진짜 좋아."

지훈은 그 말에 뭔가 뭉클해졌다.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있던 불안이, 그제야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저, 계속 가게 해도 될까요?"

어머니는 그 질문에 잠깐 지훈을 바라봤다.

"네가 하고 싶으면."

"하고 싶어요. 처음엔 어쩔 수 없이 시작한 건데, 이제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일 같아요."

어머니는 그 말에 활짝 웃었다.

"그럼 됐다. 나는 이제 뒤에서 도와만 줄게. 힘 부치는 일은 네가 하고."

그날 저녁, 어머니는 오랜만에 가게 평상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지훈은 주방에서 국수를 끓이며, 그

모습을 흘긋흘긋 봤다. 예전과 비슷한 풍경이었는데, 뭔가 조금 달랐다. 이제는 그 자리에 자신도 함께 있었다.

밤늦게 가게 마감을 하며, 지훈은 문득 노트를 꺼내 몇 줄을 적었다. 어머니가 돌아온 날, 그리고 처음으로 이 일이 자기 것이 됐다고 느낀 순간. 그 몇 줄이 쌓여, 어느새 제법 두꺼운 노트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온 뒤로, 지훈의 저녁 시간이 조금 여유로워졌다.

가게 마감을 어머니와 나눠서 하다 보니, 지훈은 종종 일찍 자유로운 시간이 생겼다. 그런 저녁이면, 지훈은 자연스럽게 민지에게 연락했다.

"오늘 시간 돼?"

"어, 잠깐."

둘은 방파제에서 만나 함께 걷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되어 있었다. 딱히 정한 약속은 아니었는데, 거의 매일 저녁 그 자리에서 만났다.

어느 날, 지훈이 문득 제안했다.

"내일 쉬는 날인데, 등대까지 가볼래? 좀 걸어야 하는데."

"등대?"

"마을에서 한 시간쯤 걸어야 해. 근데 거기서 보는 노을이 진짜 예뻐."

다음 날, 둘은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해안을 따라 난 오솔길을 천천히 걸었다. 파도 소리, 갈매기 울음소리, 발밑에 밟히는 자갈 소리. 대화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침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중간에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쉬어갈 때, 지훈이 물었다.

"소설 얼마나 썼어?"

"한 삼십 페이지쯤." 민지가 대답했다."아직 갈 길이 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