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윤은 그 얘기에 조금 놀랐다. 소정은 늘 그림과 함께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하신 계기가 있어요?"
"애들이 좀 크고 나서, 우연히 옛날 그림 몇 장을 다시 봤어요." 소정이 붓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냥, 다시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별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안 무서우셨어요? 십 년이나 손 놓으셨는데."
"무서웠죠. 근데 그거보다, 안 그리고 사는 게 더 이상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소정이 지윤을 바라봤다. "지윤 씨도 그렇지 않아요? 소설 안 쓰는 지금이, 예전보다 편해요?"
지윤은 그 질문에 잠시 생각했다.
"편하긴 해요." 지윤이 말했다. "근데 완전히 놓은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지금 당장은 이쪽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거지."
"그럼 된 거예요." 소정이 다시 붓을 들며 말했다. "언젠가 다시 그쪽으로 마음이 가면, 그때 또 가면 돼요. 지금 이걸 하는 게, 그걸 막는 건 아니니까."
지윤은 그 말을 곱씹으며 다시 캔버스로 눈을 돌렸다. 노년 여성의 옷자락에, 원본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 주름 하나가 완성돼 있었다.
"이거 봐요." 지윤이 소정을 불렀다.
소정이 다가와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네요." 소정이 말했다. "얼굴만 남았어요."
얼굴만 남기고 몇 주가 그냥 흘러갔다.
지윤은 화실에 갈 때마다 캔버스 앞에 앉았지만, 정작 얼굴 부분에는 붓을 대지 못했다. 배경도, 옷도, 자세도 다 채웠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 앞에서 손이 멈췄다.
"왜 안 그려요?" 소정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지윤이 빈 얼굴 부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여기만 남았는데, 오히려 더 무서워요."
"뭐가 무서워요?"
"틀릴까 봐요." 지윤이 말했다. "할머니 얼굴을, 이모할머니 얼굴을, 제 얼굴을 — 다 잘못 그릴까 봐요. 지금까지는 어차피 흐릿한 부분을 채우는 거였는데, 얼굴은 완전히 새로 만들어야 하잖아요."
소정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왜 못 그리셨을까요." 지윤이 이어 말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얼굴을 그리는 순간, 그게 진짜 기억이 아니라 그냥 제가 만들어낸 얼굴이 되는 거잖아요."
"맞아요." 소정이 말했다. "근데,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에요."
"어떻게요?"
"기억이라는 게 원래 그래요." 소정이 붓을 정리하며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변하고, 우리가 다시 만들어가는 거예요. 완벽하게 그대로 보존되는 기억은 없어요. 할머니가 그리려던 얼굴도, 아마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졌을 거예요."
지윤은 그 말에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럼 저는 어떤 얼굴을 그려야 해요? 이모할머니의 진짜 얼굴이요, 아니면 할머니가 기억하던 얼굴이요?"
"둘 다 아닐 수도 있어요." 소정이 말했다. "지윤 씨가 지금 이해하는 얼굴을 그리는 거예요. 할머니의 기억을 지윤 씨가 이어받아서, 지윤 씨 나름대로 완성하는 거죠."
지윤은 그날 밤 집에서, 사진첩 속 이모할머니의 흑백 사진을 다시 꺼내봤다. 어린 소녀의 얼굴. 세월이 흐르면서 이모할머니가 어떻게 나이 들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지윤은 그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그림을 완성한다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지윤은 다음 화실 시간, 흑백 사진을 챙겨 갔다.
"이 얼굴부터 시작해볼게요." 지윤이 사진을 이젤 옆에 세워두며 말했다. "정확히 똑같이는 아니어도, 이 느낌으로."
소정은 옆에서 말없이 지켜봤다.
지윤은 붓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세 번을 그렇게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첫 선을 그었다.
이마의 곡선부터 시작했다. 사진 속 어린 소녀의 이마와, 노년 여성 실루엣의 자세를 참고해서, 그 사이 어딘가의 나이를 상상하며 그렸다.
눈매를 그릴 때 손이 가장 많이 떨렸다. 사진 속 소녀의 눈은 크고 또렷했다. 지윤은 그 눈매를 살리되, 세월이 흐른 얼굴에 맞게 조금 더 부드럽게 풀어서 그렸다.
몇 시간이 지났다. 지윤은 코와 입술의 위치를 몇 번이고 지우고 다시 그렸다.
"멈춰봐요." 소정이 어느 순간 말했다.
지윤이 붓을 멈췄다.
"지금이 좋아요." 소정이 말했다. "더 그리면 오히려 과해질 것 같아요."
지윤은 한 발 물러나 캔버스를 바라봤다.
완벽한 얼굴은 아니었다. 실제 이모할머니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정확히 알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캔버스 속 얼굴은, 분명 살아 있는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용하고, 어딘가 그리운 듯한 표정.
지윤은 그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았다.
"이제 하나 남았네요." 소정이 조용히 말했다. "지윤 씨 얼굴이요."
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날은 더 그리지 않았다. 이모할머니의 얼굴을 완성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벅찼다.
일주일 뒤, 지윤은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았다. 이번엔 자신의 얼굴 차례였다.
거울을 옆에 세워두고, 지윤은 자기 얼굴을 오랫동안 들여다봤다. 눈, 코, 입의 위치를 하나씩 확인하면서도, 손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긴장돼요?" 소정이 물었다.
"네." 지윤이 대답했다. "이상하게 남 그릴 때보다 더 떨려요."
"원래 그래요. 자기 얼굴이 제일 어려워요." 소정이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근데 지윤 씨, 지금 표정 그대로 그려봐요. 그게 제일 진짜 같아요."
지윤은 거울 속 자신을 봤다. 긴장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기대에 찬 얼굴이었다.
붓을 들었다. 이마부터 시작해서, 눈썹, 눈, 코, 입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몇 번 멈칫했지만, 처음 이모할머니를 그릴 때보다는 손이 덜 떨렸다.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지윤은 붓을 내려놓았다.
"다 됐어요." 지윤이 말했다.
소정이 다가와 그림을 살펴봤다.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어때요?" 지윤이 물었다.
"완성됐어요." 소정이 말했다. "이번엔 정말로."
지윤은 한 발 물러나 캔버스 전체를 바라봤다. 노년의 여성과 젊은 여성,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은 상상으로 채운 이모할머니의 얼굴, 다른 한쪽은 지윤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림 속 두 사람의 손은, 서로 맞닿아 있었다. 원본에서는 흐릿하게만 남아 있던 부분이었는데, 완성하고 보니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 있었다.
지윤은 그 손을 오래 바라봤다. 만난 적 없는 이모할머니와, 자기 자신이 손을 맞잡고 있는 그림.
"이제 어떻게 하고 싶어요?" 소정이 물었다.
지윤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엄마한테 제일 먼저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다음은요?"
지윤은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이미 어떤 생각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주말, 지윤은 완성된 캔버스를 조심스럽게 포장해 어머니 집으로 가져갔다.
"이게 뭔데 이렇게 싸 왔어?" 어머니가 물었다.
지윤은 대답 대신 포장을 풀었다. 캔버스가 드러나자, 어머니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거……" 어머니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이거 완성한 거야? 그 상자 바닥에서 나온 그림?"
"응." 지윤이 말했다. "몇 달 걸렸어."
어머니는 그림 앞에 가까이 다가섰다. 노년 여성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봤다.
"이 얼굴," 어머니가 손끝으로 캔버스 가장자리를 살짝 만지며 말했다. "이모할머니야?"
"응. 사진 보고 상상해서 그렸어. 정확하진 않을 거야."
"아니야."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낯이 익어. 엄마도 사진으로만 봤는데."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그림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쪽은," 어머니가 젊은 여성 쪽을 가리켰다. "너네."
"응."
"손을 잡고 있네." 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원래도 그런 구도였던 것 같기도 하고."
어머니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엄마는 이 얘기, 할머니한테 한 번도 제대로 못 들었잖아. 근데 이 그림 보니까, 이제야 좀 알겠다. 할머니가 평생 뭘 안고 사셨는지."
지윤은 그 말에 뭔가 뭉클했지만, 이번엔 그 감정을 굳이 밀어내지 않았다.
"이 그림, 어떻게 할 거야?" 어머니가 물었다.
"모르겠어. 그냥 갖고만 있어도 될 것 같은데." 지윤이 말했다. "근데 소정 선생님이 계속 다른 얘기를 하시더라고."
"무슨 얘기?"
지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작은 전시를 한번 해보는 게 어떠냐고. 이 그림이랑, 할머니의 미완성 스케치북들이랑, 제가 그동안 그린 것들을 같이."
어머니는 그 말에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할 수 있겠어?"
"모르겠어. 근데," 지윤이 그림을 다시 바라보며 말했다. "이 그림, 나 혼자만 보기엔 좀 아까운 것 같아."
다음 화실 시간, 지윤은 소정에게 전시 얘기를 다시 꺼냈다.
"진짜 해보고 싶어요." 지윤이 말했다. "근데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아는 곳이 하나 있어요." 소정이 말했다. "동네에 작은 갤러리인데, 신진 작가들한테 가끔 공간을 내줘요. 크지는 않지만, 시작하기엔 딱 좋아요."
"제가 신진 작가인가요?" 지윤이 웃으며 물었다.
"오늘부터는요." 소정도 웃으며 말했다.
며칠 뒤, 지윤은 소정과 함께 그 갤러리를 찾아갔다. 오래된 골목 안쪽, 작은 상가 1층이었다. 벽 두 면과 낮은 조명, 그리고 몇 개의 이젤이 전부인 공간이었다.
"여기서 하면," 갤러리 관장이 공간을 둘러보며 말했다. "열 점 정도 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지윤은 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떠올려봤다. 화분 그림, 정물화 몇 점, 그리고 완성된 캔버스. 열 점을 채우기엔 부족했다.
"부족하면 어떡하죠." 지윤이 소정에게 물었다.
"할머니의 미완성 스케치북도 같이 걸면 돼요." 소정이 말했다. "완성작만 전시할 필요 없어요. 미완성인 채로 두는 것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니까."
지윤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시 준비는 두 달이 걸렸다. 지윤은 그동안 새 그림 몇 점을 더 그렸다. 화분, 창문, 어머니의 뒷모습, 그리고 화실 창가에서 바라본 골목 풍경.
준비 마지막 날, 지윤은 완성된 캔버스를 전시장 한가운데에 걸었다. 그 양옆으로 외할머니의 미완성 스케치북 세 권을 펼쳐 진열했다.
"제목은 정했어요?" 소정이 물었다.
지윤은 잠시 생각했다. 그동안 써온 "완성하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라는 글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글의 마지막 문장도.
"그림이 되는 시간." 지윤이 말했다. "이걸로 할게요."
소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제목이네요."
전시 첫날, 지윤은 아침부터 갤러리에 나와 마지막으로 그림들의 위치를 점검했다.
오후가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화실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어머니가 부른 친척들이었다.
"저 그림이야, 지윤아?" 외삼촌이 완성된 캔버스 앞에 서서 물었다.
"네." 지윤이 대답했다.
"할머니 얼굴, 진짜 비슷하게 그렸다." 외삼촌의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지윤은 그 말에 조용히 웃었다.
늦은 오후, 지윤은 입구 쪽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어, 왔네." 지윤이 손을 흔들었다.
"당연히 오지." 소이가 웃으며 다가왔다. "초대장 받고 얼마나 신기했는지 몰라."
두 사람은 완성된 캔버스 앞에 나란히 섰다.
"이게 그때 말한 그림이야?" 소이가 물었다.
"응. 몇 달 동안 이거 하나 붙잡고 있었어."
소이는 오래도록 그림을 들여다봤다.
"손 잡고 있는 부분," 소이가 말했다.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