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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한 계절 · 12장. 흔들리는 판단

2부 — 균열

12장. 흔들리는 판단

말하지 못한 계절 · 서용준

인터뷰 자료를 정리하던 어느 밤, 은수는 노트북 화면 앞에서 오랫동안 커서만 깜빡이는 걸 지켜봤다.

지금까지 모은 자료들을 하나의 원고로 엮어야 했다. 윤태호의 삶, 하영도와의 우정, 청년회, 체념, 그리고 그 이후의 선택들. 은수는 이 모든 걸 어떤 어조로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그동안 정리한 자료들이 색깔별로 나뉜 포스트잇과 함께 쌓여 있었다. 노란색은 확인된 사실, 분홍색은 추정, 파란색은 추가 확인이 필요한 부분. 은수는 늘 이런 방식으로 자료를 정리해왔다. 색깔로 나누면 머릿속이 한결 정돈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번 작업에서는, 그 색깔들이 자꾸 뒤섞이는 것 같았다. 분명 노란색이어야 할 사실이, 다시 보면 분홍색 추정처럼 흐릿해지곤 했다.

문제는 단순한 서술 방식이 아니었다. 은수 자신의 마음이 정리되지 않고 있었다.

태호는 분명 친일에 협력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은 자료로 명백히 증명됐다. 국방헌금 명단, 유지회 임원 명단, 그리고 스스로 "부끄러운 선택"이라 적어놓은 일기까지. 그러나 동시에, 태호는 평생 영도의 가족을 몰래 도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 도움 덕분에 정수는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어쩌면 그 도움이 훗날 정수 가족의 생계에도 어떤 식으로든 보탬이 됐을 것이다.

은수는 태호를 미워해야 할지, 고마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두 감정이 동시에 마음속에서 부딪히고 있었다.

다음 인터뷰에서, 은수는 이 혼란을 지원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저 요즘 원고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계속 막혀 있어요."

"왜요?"

"태호 어른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친일 행위를 한 사람이라고만 쓰기엔, 그분이 남긴 다른 흔적들이 자꾸 걸려요. 근데 그 도움을 강조하면, 마치 그게 친일 행위를 상쇄하는 것처럼 읽힐까 봐 걱정되고요."

지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 두 개가 꼭 상쇄되는 관계는 아니지 않을까요? 나쁜 일을 했다고 해서, 좋은 일을 한 게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좋은 일을 했다고 해서, 나쁜 일이 없었던 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맞아요. 근데 그 둘을 동시에 보여주는 문장을 쓰는 게,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왜 어려워요?"

은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보통 이야기 속 인물을 좋은 사람이나 나쁜 사람으로 나누고 싶어 하거든요. 그래야 마음이 편하니까요. 근데 태호 어른은 그렇게 나눌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사실... 그게 더 진실에 가깝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쓰는 게 왠지 두려워요."

"뭐가 두려우세요?"

"어쩌면, 제가 그분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 자체가요."

지원은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비슷한 느낌이에요. 처음엔 그냥 미워하고 싶었거든요. 근데 자꾸 이해가 되니까, 그게 오히려 불편해요. 마치 제가 뭔가 잘못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서."

"저도 그래요."

"근데 작가님," 지원이 조금 다른 각도에서 물었다. "만약 이 이야기에 정답이 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딱 떨어지지 않는 거잖아요."

"맞는 말이에요. 근데 독자들은 정답을 기대할 텐데."

"모든 독자가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저도 이제는, 딱 떨어지는 답보다 이 복잡함 자체가 더 진실하게 느껴지거든요."

그 말에, 은수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은수는 태호의 일기를 다시 펼쳤다. 이번엔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다시 읽어봤다.

청년회 시절의 열정, 영도의 체포 이후의 혼란, 아버지의 압박, 그리고 체념에 이르는 과정. 은수는 그 흐름을 하나의 이야기로 다시 정리해보려 애썼다. 그러나 정리하려 할 때마다, 자꾸 어떤 지점에서 멈추게 됐다.

만약 태호가 그렇게 흔들리지 않았다면. 만약 아버지의 압박에도 끝까지 버텼다면. 그랬다면 지금 이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태호도 영도처럼 옥고를 치렀을 수도, 혹은 더 나쁜 일을 겪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의 집안도, 하영도의 집안처럼 오랜 세월 낙인 속에서 살아야 했을지도 몰랐다.

은수는 그 가정 앞에서 매번 걸음을 멈췄다. 자신이 태호를 판단할 자격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판단이라는 게 늘 그랬다. 멀리서 보면 선명해 보이던 것들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꾸 흐릿해졌다.

동시에, 은수는 그 판단을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었다. 태호의 선택으로 인해, 다른 누군가는 더 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영도는 삼 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청년회는 흩어졌고, 그 시절 함께했던 사람들 중 몇몇은 더 가혹한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태호의 체념이 아무리 인간적으로 이해된다 해도, 그 선택이 초래한 결과까지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은수는 문득 궁금해져, 청년회 발기인 명단에 있던 다른 이름들도 다시 찾아봤다. 대부분은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중 한 명, 원식이라는 이름의 인물은 국사편찬위원회 기록에 짧게 등장했다. 청년회 해산 이후 다시 다른 항일 조직에 가담했다가, 1930년대 초 옥중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은수는 그 짧은 기록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원식이라는 이름은, 태호의 일기에도 한 번 짧게 언급됐던 이름이었다. "지난주에 원식이가 붙잡혀 갔다며." 그 문장을 쓸 때, 태호는 이 사람이 훗날 옥중에서 죽음을 맞으리라는 걸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은수는 그 문장 앞에서 다시 손을 멈췄다. 다락에서 편지를 처음 찾아낸 밤, 두 사람이 나눴을 법한 대화를 혼자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그때 지어냈던 장면 속에서도, 태호는 똑같이 원식의 이름을 꺼냈었다. 근거 없이 지어낸 말이었는데, 실제 일기 속 문장과 이렇게 닮아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어쩌면 두 사람이 남긴 흔적이, 짐작보다 훨씬 또렷하게 남아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이름조차 제대로 남지 않은 채 스러져간 사람들. 그들 앞에서, 태호의 체념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지, 은수는 다시 한번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수는 자정이 넘도록 그 사이를 오가며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이해와 면죄는 다른 것이었다. 이해는 그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아보려는 노력이고, 면죄는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은수는 태호를 이해하고 싶었지만, 그를 면죄해줄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은수는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이해와 용서는 다르다. 이해와 정당화도 다르다. 나는 태호를 이해하고 싶지만, 그를 용서하거나 정당화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건 아마 내가 아니라, 그 시절 그의 선택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다만 그 몫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렇다면 이 판단은, 누구의 몫으로 남는 것일까.

문장을 다 쓰고도, 은수의 마음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그 불확실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쩌면 이 원고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는 대신, 이 흔들림 자체를 정직하게 담아내야 하는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창밖으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은수는 노트북을 열어, 처음으로 원고의 첫 문장을 써보려 했다. 몇 번을 지웠다 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그날은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